30자료의 소실로 인해 정확한 연대를 추적하기 어려우나 대한 소아과학회 대구경북 소아과 지회는 8. 15해방 6.25동란과 같은 어려운 역경을 겪은 후 국가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던 1950년대 후반 경에 당시 대구의과대학 부속병원의 교수들과 동산병원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원래 소아과 의사들이 지역민들의 질병 치료와 예방에 관심을 갖게 됨으로서 자연스럽게 모임이 형성된 듯하다.
이즈음 6.25동란 과정에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의료진들이 우리history_image01나라에 대거 진출함에 따라 새로운 지식과 최신의 의료기술들이 도입되어 새로운 기류가 조성되었고 지역에서도 질병치료 중심의 질병의 예방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가운데 모자보건 사업의 하나로 경상북도 보건국과 공동으로 우량아선발대회를 주최하면서 대한의학협회 소아과 분과학회 소속의 ‘소아과 경북지회’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듯하다. 학문에 대한 열정도 높아 이미 이 무렵에도 학술 집담회를 정례적으로 갖게 되었고 회원들 간의 친목도 도모할 수 있어 지회로서의 기틀이 차츰 형성되었다. 이 당시(1950 -1960년대)지회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있어 최정헌, 정환탁, 한동섭, 손영규, 정필수, 박종무, 김집, 차승만, 안두홍 등과 같은 분들의 공헌이 크다.
1970년대에 들어서 지회의 역할이 더욱 다양해졌으며 그동안 해오던 우량아 선발대회를 더욱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실시하게 되었고 지역의 세균성 전염병에 관한 문제, 고아원 및 기독교 양자회 어린이들의 육아지도, 대구 시내 및 인근 농촌의 초등학생들의 급식과 성장 발육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어린이 보건 향상에 여러 면으로 기여를 하였다. 당시 지회의 발전을 위해 원로 회원들 외에도 이재근, 황현규, 김윤자, 박영해, 신동학, 윤경노, 송창화 등과 같은 분들이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970년대 후반에는 그동안 지회에서 활동하다가 도미하여 최신 의학에 대한 식견을 습득하고 다시 귀국한 강진무, 구자훈, 하정옥 등과 같은 분들이 지회서 다시 활동하기 시작하고 지역에 영남의대, 계명의대가 설립되면서 새로운 면모를 띄게 되었다.
1982년은 지회로서는 또 다른 분기점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이는 지회의 대구지역의 역할이 중요시되면서 지회의 이름을 ‘대한소아과학회 대구 경북지회’로 하고 창립총회를 가졌고, 이때부터 지회의 역할이 보다 다양해졌고 1985년 동국의대가 신설되며 학술활동도 더욱 활성화되었으며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려는 본격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서 1990년대의 도약을 대비한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에 황현규, 김병태, 강진무, 김진원 등과 같은 분들이 지회를 대표하며 헌신하였다.
1990년대에는 지회로서는 도약의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1991년 대구 카톨릭 의대가 신설되며 지역 내 의과대학이 무려 5개가 됨으로서 학문적으로도 대구 경북지역이 전국적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같은 해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소아과 개원의 협의회가 결성되었고 초대 회장으로 김윤자 회원이 선임되어 개원가의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게 되었고 타 지역의 개원의 협의회 결성의 모태가 되었다. 이러한 태동과 함께 새로운 인식과 안목을 갖춘 젊은 회원들이 많이 배출됨에 따라 지회는 또 다시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1990년에는 회원 수가 무려 360명이나 되는 큰 모임이 되었다. 이 시기에 지회를 이끌며 헌신하신 분들로 신중열, 김윤자, 백태룡, 박상곤, 김영명, 구자훈, 백철홍, 이택세, 하정옥 등을 들 수 있다.
2000년은 의약분업과 관련되어 의료계 전체가 고통을 받고 땀을 흘리고 한 시기로 지회로서도 어려웠던 시기였다. 하지만 의료제도의 개선을 위해 김종환 회장을 중심으로 지회가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 전국적으로도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성과라면 회원들 간의 결속을 어느 때보다도 강화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 같다.